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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 주중상춘도, 송하관폭도, 경답목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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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윤덕희 - 누각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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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 윤용 - 연강우색도.

공재 윤두서

 

1668(현종 9)∼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1774년(영조 5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장남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인 윤용(尹熔)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문을 이루었다.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윤선도이수광(李睟光)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가풍을 이어 과거시험에 매진하였다. 1693년(숙종 1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해남 윤씨 집안이 속한 남인 계열이 당쟁의 심화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남은 일생을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다. 1712년 이후 고향 해남 연동(蓮洞)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715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의 전환기에 활동한 윤두서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조선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을 지니는 동시에 18세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경향의 선구적 자리에 위치한다. 윤두서가 새로운 회화 경향을 선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방대한 중국 서적의 독서 경험에서 온 것이다.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조사하고 작성한 『해남윤씨군서목록(海南尹氏群書目錄)』에는 중국의 화보, 서화가의 문집과 이론서 등 방대한 양의 중국출판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서화 학습에 얼마나 전념하였는가를 증명한다.

그는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특히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그의 말 그림과 인물화의 특징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정확한 묘사력을 구사하는 사실성에 있다. 대표작은 해남 녹우당의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전신사조의 이념을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자화상」을 통해 그의 심성과 인간상을 그려볼 수 있다. 자화상에 표현된 비장미는 현실과 괴리감에서 나오는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해남의 종가에는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화첩으로 성첩되어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었다. 종가 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旋車圖)」, 「돌깨기」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採艾圖)」 등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농민들의 노동을 주제로 하는 그의 풍속화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다. 아울러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 등에 의하여 크게 보급되었던 18세기 풍속화를 예시하고 있다.

아들 덕희가 쓴 행장에도 나타나듯이 윤두서의 작품에서는 실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직접 제작한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일본 지도(日本地圖)」,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李潛), 이서(李漵)이익(李瀷) 형제들과의 교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의 회화는 중국적이거나 전통성이 강하지만 18세기 중·후반 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의 유품에는 중국 남종 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수용에 중요한 지침서인 『고씨역대명화보(顧氏歷代名畵譜)』도 있어서 그가 화보를 통해 남종화풍(南宗畵風 :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과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의 경향)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종가 소장의 가전화첩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관념적인 산수화를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 「백포별서도(白浦別墅圖)」와 같은 실경산수도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에게 계승되었다. 아울러 강세황, 유경종 등 근기 남인 서화가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말기의 화가 허련(許鍊)해남녹우당(綠雨堂)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丁若鏞)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풍부한 지식과 실학적 태도는 이서, 이익 형제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예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가 서도(書道)가 무너진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이서와 함께 서예의 정도 회복을 위하여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하여 조선후기 서예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작품으로는 「자화상」,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白馬圖)」 등이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에 전하고 있다. 이 화첩은 산수(山水), 산수인물(山水人物), 영모(翎毛), 화조(花鳥), 초충(草蟲), 도석 인물(道釋人物), 화훼도(花卉圖)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노승도(老僧圖)」, 「심득경초상(沈得經肖像)」, 「출렵도(出獵圖)」, 「우마도권(牛馬圖卷)」,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십이성현화상첩(十二聖賢畵像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에 전주이씨 병와공파 중종에서 소장한 유가의 다섯 성인을 그린 「오성도(五聖圖)」, 새롭게 알려진 『가물첩(家物帖)』 등이 있다. 저서로는 『기졸(記拙)』『화단(畵斷)』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