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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 주중상춘도, 송하관폭도, 경답목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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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윤덕희 - 누각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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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 윤용 - 연강우색도.

청죽화사(聽竹畵史) - 남태응

조회 수 7270 추천 수 0 2014.03.08 16:42:42

청죽화사(聽竹畵史)는 남태응의 미간 문집인 육필본 청죽만록(聽竹漫錄)의 별책인 청죽별지(聽竹別識)의 맨 뒷부분에 실려 있는 화평이다.

이 글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의 「서화가」편에 인용되고,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도 재인용되어 원래의 책 이름보다도 「청죽화사」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청죽만록』 자체가 육필본으로 아직 간행되지 않아 「청죽화사」는 인용된 글로만 알려져 온 것이 근래에 발굴되어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6-6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그림은 품격이 매우 높았으며, 채녀(彩女 궁녀)와 수선화를 잘 그렸으나 재주껏 그리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두서(尹斗緖)가 그의 채녀도(彩女圖)를 보고서 선비의 그림 중에서 제일로 꼽았다.

判書金鎭圭 畵品甚高 工彩女水仙 而不肯竟其才 然尹斗緖見其彩女圖 推爲儒畵中第一

7-3

윤두서는 참의(參議)을 지낸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호는 공재(恭齎)이다.
공재는 본래 그림에 대하여 듣고 보아 익힌 바와 선생에게 자질을 배워 전수 받은 바 없었다. 어렸을 적에 우연히 '唐詩畵譜'와 '顧氏畵譜' 등의 화첩을 보고서 이것이 마음에 꼭 들자 열심히 베끼면서 연습하여 무릇 점 하나 획 하나 소홀하게 지나쳐 버리지 않고 반드시 그와 똑같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연습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하는 동안 그 화법을 모두 얻어내고 다루는 대상마다 잘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요체까지 뚫고 나아가면서도 오히려 미진하다고 생각했다.
尹斗緖乎斗緖參議善道之曾孫也號恭齋於畵本無聞見之習師資之傳, 而少時偶閱唐詩顧氏兩畵 譜等帖, 犁淵心契屈首臨習, 凡一點一劃無敢放過, 期於必似如是者 有年畵得其法觸類而長之透及肯綮而揂以爲末也
 

7-6

말을 그린 것은 장년에 이르러서인데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하여 보기를 몇 년간 계속했다. 무릇 말의 모양과 의태(意態)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보아 털끝만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연후에야 붓을 들어 그렸다. 그렇게 그려 본 그림을 참모습과 비교해 보고서 터럭 하나라도 제대로 안됐으면 즉시 찟어버리고 반드시 참모습과 그림이 서로 분간 못할 정도에 이른 다음에야 붓을 놓았다. 동자를 그릴 때에는 머슴아이를 앞에 세워 놓고서 돌아보고 또 움직여보게 하면서 그 참 모습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붓을 들고 또 말을 그릴 때처럼 하였다. 나무를 그릴 때면 달빛 그림자 진 것을 땅 위에 본뜨며 그려보고 연습하여 그 참모습을 얻으면 화법으로 옮겼다. 기타 모든 물체를 모두 이런 형식으로 하였다.

畵馬 則長年立


8-2

그러므로 그 수법은 다른 화가들과는 빼어나게 다르고, 화격은 중국의 뼈와 모태를 빼앗을 정도였으니 형상과 물체가 더욱 핍진(逼眞)하고 더할 수 없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그 정교함이 묘(妙)의 경지에 으르렀다. 이리하여 공재의 이름은 일세(一世)에 회자되어 강희안, 김시, 김명국 등의 작가를 뛰어넘어 공민왕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故其手法絶異東方畵格

 

8-5


 

윤두서는 마치 공수반(公輸般)이 끌을 잡고 사람의 상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먼저 몸체와 손발을 만들고 그 다음 이목구비를 새기는데 공교로움을 다하고 극히 교묘하게 본떠서 터럭 하나 사람과 닮지 않은 것이 없으나 아직 부족하다 하여 급기야 그 속에 기관(機關)을 설치하여 스스로 발동하게끔 함으로써 손은 쥘 수 있고, 눈은 꿈적거릴 수 있고, 입은 열고 벌릴수 있게 한 다음에야 참모습과 가상(假像)이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화를 얻어낸것과 같다. 그러니 기관이 발동하기 이전까지는 아직 배울 수 있으나, 그 이후는 불가능할 것이다.
 

 

8-5 ~8-8
윤두서가 유명해지기 전에 사대부 허립에게 용 그림과 말 그림을 그려 주었다. 이것은 대개 치우쳐 잘하는 장기였던 것이다. 창곡 홍득구가 이를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공민왕 이후에 이런 그림이 없었다. 어디서 났느냐?"하니 허욱이 웃으면서 그 이름을 말해주자 그를 맞이하여 만나고는 환대하기를 늘 평소에 알던 사람처럼 하였다. 대저 공재를 공민왕과 대등하다고 말한 것은 홍득구가 주장한 것이다.
當其末甚著名也 爲士人許煜畵與龍與馬
  
9-8
대개 윤두서는 인물화를 잘 그렸으나 산수는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먹을 사용함에 있어서 너무 짙게 하여 소담하고 평원한 맛이 결여되었고 포치가 미숙하여 무르익고 윤택한 면이 없었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윤두서는 시종 역량이 부족하고 개척해 나아간 것이 모자라서 갈고 닦은 공은 빼어나지만 천연스럽고 진실로 웅혼한 기상은 적어 작은 것에서는 빼어나지만 큰 것에까지는 밀고 나아가지 못했다. 작은 것은 작을수록 더욱 묘하지만 큰 것은 클수록 미치지 못하였다. 손바닥만한 편폭에 종로 거리를 그리면 지나가는 행인은 개미만한 크기가 될터인데도 이목구비를 다 갖추고 모두가 살아 있는 듯이 활동하니 묘하고도 묘한 것이다. 그러나 긴 족자의 대폭에 이르러 붓을 손에 맡기면서 일필휘지로 휘둘러 그려내는 것이라면 부득불 김시와 김명국에 양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윤두서는 일생동안 그린 것이 화첩 정도였고 병풍이나 족자는 드물었다. 그것은 대작이 힘들어서 꺼린 것이 아니라 기실 자신의 단점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恭齋偏工人物而山水非其0長行墨
 

10-1

치밀함을 더하여 정교하게 풀어내고 교묘히 깨달은 것이 완벽한 경지에까지 나아간 것은 윤두서가 극히 잘 한 일이요 김명국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르나 그 필세(筆勢)가 자유분방하고 천기가 유동하여 앙앙히 하늘을 뛰어넘고 땅을 뽑아내는 듯한 기운이 있어 능대능소(能大能小)하며 일삼음이 없어도 저절로 호방하고, 기발함을 기대치 아니하여도 저절로 기발하여 신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김명국이면 가능해도 윤두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윤두서가 正道를 얻었다면 김명국은 변화를 얻었고, 윤두서가 王道에 가깝다면 김명국은 伯道에 가깝고, 윤두서는 더 이상 단련할 그 무엇이 없지만 김명국은 추려낼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精觧竗悟以造0分之境者恭齋之極工而非蓮潭

 
11-4
윤두서는 자기 예술에 대한 긍지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높아서 그림을 구하려는 자가 문간에 가득할 정도였는데 모두 손을 내저으면서 거절하였고, 간혹 응하더라도 신회가 일어난 다음에야 그렸으니 열흘 걸려 물을 그리고 닷새 동안 돌을 그리는 식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거나 한 획이라도 화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즉시 폐기해버리면서 그 동안 공들인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반드시 십분 득의하고 십분 조화롭고 공교로워야 내놓았다. 그래서 윤두서의 그림은 시중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그리고 전하는 그림들이 절묘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그 이름을 얻은 것이 김명국이나 김시보다 더했던 것이 대개 이런 때문이다.
恭齋挾藝自高 矜持太過 
 
11-10
세상의 그림 모으는 사람들은 안견, 최경의 작품을 원하지 않아도 윤두서의 작품을 얻기를 원했으며, 윤두서의 그림 한 폭을 얻으면 양송당 김시의 그림 열 폭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집집마다 소장하고 있는 김명국의 그림은 1백 폭이라도 윤두서의 그림 한 폭을 당하지 못했다.
孝彦畵擧世寶之 每一紙出  
 

13-3

삼화가유평(三畵家喩評) - '세 화가를 비유하여 평함' 김명국 이징 윤두서 

 

『 문장가에는 삼품(三品)이 있는데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그것이다.

 

이것을 화가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연담(김명국)은 신품에 가깝고

허주는 법품,

공재는 묘품에 가깝다.

 

이것을 학문에 비유하자면

연담은 태어나면서 아는자(生而知之) , 

공재는 배워서 아는자(學而知之) ,

허주는 노력해서 아는자(因而知之)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면 매한가지이다.

 

또 이것을 우리나라의 서예가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연담은 양 봉래,

허주는 한 석봉,

공재는 안평대군 류에 속한다.

 

연담의 폐단은 거칠음에 있고,

허주의 폐단은 속됨에 있으며,

공재의 폐단은 작음에 있다.

 

작은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가 없다.

 

연담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不可學), 

공재는 배울 수는 있으나 이룰 수 없고(可學而不可能),

허주는 배울 수 있고 또한 가능하다. (可學而亦可能) .』

 

文章家有三品曰神品曰

 

15-2

김명국은 그 재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공교로운 솜씨를 끝까지 구사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비록 신품이라도 거친 자취를 가릴 수 없었다. 윤두서는 그 재주를 극진히 다했고, 그 공교로운 솜씨를 끝까지 다했다. 그래서 묘하기는 하지만 난숙함에서는 조금 모자랐다. 허주는 그 재주를 다하고 그 솜씨를 다했으며 난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다만 법도 밖에서는 더불어 논할 수 없다. 

그래서 세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장소에서 함께 말을 타고 달리게 한다면, 질주하면 같이 질주하고 천천히 달리면 같이 천천히 달려 대략 서로 비슷하지만 분연히 먼지를 일으키며 급히 달리면 이징은 거의 맨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춘추시대에 비유한다면 김명국과 윤두서는 진晋과 초楚가 서로 동맹하여 번갈아 맹주 노릇하는 것과 같다. 김명국은 초나라와 비슷하니 초는 힘이다. 윤두서는 진나라와 비슷하니 진은 의로써 하나니 의는 힘쓸 수 있으나 힘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징은 진秦와 비슷하여 비록 스스로 한쪽 방면에서는 우두머리 노릇을 하지만 감히 동쪽을 바라보면서 진과 초에 항거하거나 제후들과 다툴 수는 없는 것과 같다.

蓮潭末0其才末究其工也故雖神 

 

26-7 

「인재 일강희안(一姜希顔)이 나자 안견(安堅) · 최경(崔涇)이 대(對)가 되고 신세림(申世霖) · 석경(石敬) · 이흥효(李興孝)· 이불해(李不害) · 이상좌(李上佐)가 서로 대(對)가 되고 김제(金褆)가 나자 이정(李楨) · 학림정(鶴林正)이 대(對)가 되고 어몽룡(魚夢龍)이 나자 석양정(石陽正)이 대(對)가 되고 김명국(金明國)이 나자 이징(李澄)이 대(對)가 되었다 김명국(金明國) · 이징(李澄) 두 사람이 죽은 뒤 근 백 년이 가깝게 비로소 윤두서(尹斗緖) 한 사람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와 이름을 겨룰 자가 없으니 전인(前人)들보다 더욱 빛나는 명예를 지녔다 하겠다」
國朝可知也 仁齋出而 安堅崔逕對之 申世霖石敬李興孝李不害  

28-8 
두서는 긍지가 너무 과하여 남의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으나 오직 이사관(李師寬)ㆍ이하곤(李夏坤)ㆍ민용현(閔龍顯)이 요구하면 즉시 응하여서 이 사람들은 모두 3, 4첩(帖)씩 간직하였고, 장자(障子)에 그린 것도 많았다. 하곤에게는 만마도(萬馬圖)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서인(西人)이었으므로 이 때문에 비방(誹謗)이 떼지어 일어났다. 그의 친구인 문관 홍중휴는 실랄한 얼굴로 꾸짖어 윤두서는 그것을 크게 한스러워 했다.
恭齋負其絶藝 矜持太深 絶不應求人 而惟李師亮李夏坤閔龍顯者 有求0副 各藏三 四帖 障畵亦多 夏坤則有萬馬圖 三人皆西人也 以此謗議朋興云
 
 29-2
공재의 진적으로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은 사대부 집안보다 중로인에 더 많았다. 수표교에 사는 최씨 성을 가진 한 중인은 매우 많이 비축하여 권축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근래에 중로인이 가짜를 만들고 공재의 도장을 찍어 혼란시켜 놓았다. 혹 속아서 그것을 사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恭齋眞跡之行于世者...
 
29-4
숙종 말년에 임금의 화상을 그리려고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이면 벼슬아치거나 선비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청역(廳役 어용청)에 예속시켰다. 그때에 두서(斗緖)는 마침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임금이 기복(起復)시키고자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의논하기를, “예에, ‘군자는 남의 친상(親喪)을 빼앗지 아니하며 또한 친상을 빼앗길 수도 없는데, 오직 전란(戰亂) 때만은 불가피하다.’ 하였습니다.지금 전하의 어용(御容)을 모사하는 것이 사체가 매우 중하나, 전란의 위급함과는 다릅니다. 전하께서 두서를 꼭 기복시키는 것은 남의 친상을 빼앗는 것이며, 신하가 왕명을 그대로 받들면 이것은 친상을 빼앗겼다 할 것이니 결코 좋은 시대에 있을 일이 아닙니다. 전란이라 할지라도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임금으로서 상중의 신하를 기복시키는 것은 잘못이나 상중의 신하라도 임금의 명대로 거행함은 예(禮)이다’ 하였는데, 하물며 전란이 아닌데도 신하를 기복시킬 것입니까. 국가를 유지함은 예법을 엄하게 하는데 있으니, 경솔하게 변경하고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또 명이 내린 뒤에 명을 받은 자가 마침내 그대로 받들지 아니하면 한갓 국가 체면만 손상되고 일에 무익하오니 이 점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두서는 부끄럽게 여겨서 해남(海南)으로 아주 돌아가서 화필(畫筆)을 끊고 그리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죽었다. 그때 어용을 그린 화가는 화사 진재해였다.
肅廟末年將模 御容苟以畵名者無論朝士韋布 皆隷于廳役 時斗緖適居憂 上 
 
30-5
공재는 선비인 심득경과 금석처럼 사귀었다. 심득경이 세상을 떠나니 공재가 그의 모습을 생각하여 초상을 그렸는데,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것을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다. 마치 죽은 이가 되살아 온 것 같았다.
恭齋與士人 沈得經爲石交 及得經死 斗緖追作畵像 歸其家 渾舍驚泣 如孫叔敖復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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